




어느 누구도 있던 사람이 빠져나간 공백감조차 느끼지 못 했다.
백란은 그야말로 완벽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잊혀진 초상
레지나의 방은 언제나 말끔하고 정갈했다. 톤 낮은 이끼색 벽지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방 안을 부드럽게 밝혔다. 주인이 드나들지 않아도 먼지하나 없는 이 깔끔한 방에 있는 온기라고는 그게 전부였다. 백란은 차가운 벽을 손으로 짚었다. 서늘함이 뼈를 타고 등골을 훑어 내려갔다. 한참을 그렇게 짚고 있다가 팔레트로 손을 옮겼다. 빨간색, 노란색, 보라색……. 그와 가장 잘 어울리는 색들로만 가득 물감을 짜서 붓에 묻혔다. 그리곤 이 방에 있는 가장 이질적인 물건으로 시선을 옮겼다. 새하얀 백지가 초라하게 걸려있는 액자 바로 옆에 금장 테두리에 그려진 화사한 얼굴. 섬뜩할 정도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두 눈은 붉게 빛났고, 올곧은 자세는 왜소한 몸집에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백란은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방의 주인은 알지 못 할 그림, 레지나 비앙카의 초상을.
레지나의 죽음은 그다지 충격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페러렐 월드에서도 수없이 많은 죽는 결말을 맞이했다. 모든 죽음은 백란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자살, 레지나와 협의된 죽음으로 끝이 났다. 망해버린 세계에 그럴듯한 엔딩은 없다. 멸망해버린 세계는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백란이 아무리 손에 쥐고 흔들어도 트리니셋테가 완성되지 않을 세계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걸 버리기로 결정한 것뿐이었다. 단지 혼을 옮겨 다닐 수 있는 백란과는 다르게 레지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사용하기로 한 것뿐이었다. 그 자살은 반드시 권총으로 이루어졌으며, 백란 또한 그녀가 무슨 방법으로 돌아오는지 알 수 없었다. 완벽한 신뢰와 믿음을 계약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궁금하더라도 의심할 순 없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 죽음은 달랐다. 지금 세계는 아직 진행 중이었으며 트리니셋테가 힘을 이루기 가장 완벽한 조건인 세계였다. 죽음도 평소와 같은 총이 아닌 짧고 날카로운 단검이었다. 어느 것 하나 다를 것 없는, 손잡이가 나무로 이루어진 투박한 칼. 그 후로 백란의 능력으로도 페러렐월드 그 어느 곳에서도 레지나를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있던 사람이 빠져나간 공백감조차 느끼지 못 했다. 백란은 그야말로 완벽한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한참을 그림만 바라보던 백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되면 계약 위반이네, 렌 쨩. 나쁜 아이인걸- 나는 모든 정보를 공유받기로 약속되었는데 말이야. 너의 정보까지도. 왜 나만 너를 알고있는걸까? 왜 아무도 너의 죽음을 위로하지 않는 걸까? 좀 더 일찍 눈치 챘어야 했는데. 왜 모든 걸 궁금해 하는 너를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았던 걸까?”
백란은 한참을 더 생각했다. 모두가 호감을 갖던 너를 잊은 걸보면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죽어도 남는 것이 없단 점을 외롭게 여길까? 너를 사랑하던 것들을 분노하며 미워할까? 어느 쪽이든 그럴 리 없었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네가 무슨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지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너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아무도 너를 기억하고 그리워할 수 없도록. 너와의 추억, 기억, 정보를 갖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기억만이 낳을 수 있는 존재의 정의, 그러니 너는 나에게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백란은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시선을 올려 레지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나는 누가 정의해주지? 내 존재, 내 정보, 내 기억과 추억은 누가 정의를 하는가. 나를 존재로써 정의해줄 사람은 이제 누가 있는가. 백란은 이제 혼란스러웠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죽음인지,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은 사람이 죽음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죽은 것은 그림 속에 걸려있는 레지나가 아니라, 그림 속에서 바라보고 있는 자신인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저건 그림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안이 그림일지도 모르지. 그래서 네가 날 바라보는 방향으로 액자에 맞춰 고개를 내밀게 된 것일지도 몰라. 진정한 세계는 레지나, 네가 가지고 있던 게 아닐까? 네가 내려다 본 이 그림이 싫증난 건 아닐까?
그림 속의 레지나는 자세를 비틀었다. 어지러웠다. 마치 이 세상이 거꾸로 쏟아진 것 같았다. 그는 곧 자신을 찔렀던 그 날카로운 도구를 꺼내들어 백란을 향해 치켜들었다. 본능적으로 그 칼날을 잡으려고 했으나 손에 닿지도 않았다. 백란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떨어트릴 뻔한 붓을 잡느라 손이 뻘건 물감 범벅으로 물들었다. 다시 올려다 본 그림은 조금 섬뜩하게 눈을 빛내긴 해도 온화한 얼굴 그대로였다.
백란은 숨을 길게 내뱉으며 말했다.
“넌 역시 영리하구나. 흥미가 생겨.”
백란은 붓을 고쳐 잡았다. 붉은색 물감을 아까보다 두 배는 묻혀 바로 옆 빈 캔버스를 가득 채웠다. 그 위로 머리를 박았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의 첫 번째 죽음이었다.





